그날도 평소 다니던 길이었습니다.
비가 내렸지만 앞이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어요.
늘 지나던 커브에 늘 타던 속도로 들어갔습니다.
하필 그 자리에 맨홀과 철판이 깔려 있었어요.
젖은 낙엽과 흙, 모래도 함께 있었습니다.
바퀴가 밀리는 느낌은 손쓸 새도 없이 지나갔습니다.
넘어졌고, 가볍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다쳤어요.
그 뒤로 비 오는 날을 아예 접었느냐고 물으신다면 아닙니다.
저는 지금도 탑니다.
대신 속도와 코너를 도는 습관을 바꿨어요.
그리고 출발 전에 탈지 말지를 미리 정해 두고 나갑니다.
오늘은 그 기준을 정리해 보려 합니다.
행정안전부가 운영하는 자전거 포털에는 안전 이용수칙이 있습니다.
우천에 대한 문장은 짧고 분명합니다.
“비가 올 경우 가급적 이용을 자제”하라고 적혀 있어요.
탈 경우에는 우산을 쓰지 말고 비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저도 이 문장이 출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수칙에 우천 주행법이 자세히 나오지는 않습니다.
젖은 노면에서 어떻게 타라는 항목은 따로 없어요.
그러니 나머지는 각자 기준을 만들어야 합니다.
속도 쪽을 찾아보다 뜻밖의 사실을 알았습니다.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에는 악천후 감속 규정이 있어요.
비로 노면이 젖으면 최고속도의 20%를 줄이라고 합니다.
가시거리가 100m 이내면 50%를 줄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 의무의 대상은 ‘자동차등’입니다.
자전거에는 법이 정해준 감속 숫자가 없습니다.
제 옆을 지나갈 차에게는 기준이 있는 셈입니다.
정작 저에게는 없어요.
비 오는 날 제 속도는 제가 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넘어지고 나서야 이걸 알았습니다.
왜 비 오는 날만 따로 볼까요.
참고할 만한 숫자가 하나 있습니다.
도로교통공단이 2016~2020년 빗길 교통사고를 분석했어요.
치사율이 사고 100건당 2.2명으로 나왔습니다.
맑은 날의 1.6명보다 1.4배 높은 값이에요.
다만 이건 자전거만 따로 뽑은 통계가 아닙니다.
그래도 같은 도로를 함께 쓰는 차들의 이야기이긴 합니다.
2. 제가 미끄러진 곳은 ‘비 오는 도로’가 아니었습니다
사고를 곱씹으면서 이상한 점이 있었어요.
그날 젖은 길을 한참 달렸는데 멀쩡했습니다.
미끄러진 건 특정한 한 지점이었어요.
맨홀과 철판, 그리고 낙엽과 모래가 겹친 자리였습니다.
젖으면 노면이 얼마나 미끄러워지는지는 측정된 값이 있습니다.
국내 연구에서 같은 아스팔트 포장을 마른 상태와 젖은 상태로 비교했어요.
미끄럼저항이 조건에 따라 24~43% 떨어졌습니다.
가장 흔한 밀입도 아스팔트는 BPN 72.0에서 41.4로 내려갔고요.
다만 이것은 실험실 시편 측정값입니다.
제가 달린 도로의 값이라고 옮겨 적을 수는 없습니다.
철판과 그레이팅은 지침에도 적혀 있는 위험입니다
「자전거 이용시설 설치 및 관리 지침」이라는 국가 지침이 있습니다.
여기에 바퀴가 끼일 수 있는 줄눈과 배수시설 이야기가 나와요.
그런 것을 자전거 진행방향과 평행하게 두지 말라고 못 박습니다.
라이더들이 감으로 피하던 것이 실제 조문으로 있는 셈이에요.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이 지침은 자전거도로를 새로 만들 때의 설계 기준입니다.
이미 깔려 있는 차도의 그레이팅을 되돌려 주지는 않아요.
그러니 그 구간은 결국 제가 피해서 가야 합니다.
모래는 청소 대상이고, 낙엽은 근거를 못 찾았습니다
같은 지침에는 관리 항목도 있습니다.
자전거도로와 길어깨에 흩어진 모래와 파편은 정기 청소 대상이에요.
지침은 이런 것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제가 밟은 흙과 모래는 여기에 해당합니다.
낙엽은 조금 달랐습니다.
젖은 낙엽의 미끄러움을 다룬 국내 공식 기준이나 측정값을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 대목은 제 경험으로만 적습니다.
가을 강변길에서 낙엽이 몰린 구간은 저는 그냥 피합니다.
같은 지침에는 곡선 구간 설계 기준도 있습니다.
자전거를 15도까지 눕히는 것을 전제로 계산해요.
설계속도 30km/h 구간의 권장 최소 곡선반지름은 27m입니다.
바깥쪽을 높이는 편경사도 최대 3%까지만 줍니다.
설계가 상정한 기울기 자체가 크지 않다는 뜻이에요.
마른 날에는 이 여유 안에서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젖은 철판 위에서는 그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어요.
지금은 커브에 들어가기 전에 속도를 줄입니다.
코너 안에서 브레이크를 잡지 않으려고요.
자전거를 눕히는 대신 상체를 조금 더 세우는 편입니다.
3. 브레이크는 ‘덜 듣는’ 게 아니라 ‘늦게 듣습니다’
저는 비 오는 날 브레이크가 약해진다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타이밍의 문제에 가까웠어요.
마빅의 공식 기술 문서에 그 설명이 있습니다.
젖은 림브레이크는 레버를 당겨도 곧바로 듣지 않아요.
패드 밑의 림이 마르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카본 림은 그 감각이 알루미늄보다 더 완만하게 온다고 적혀 있습니다.
잡았는데 아무 일도 없는 그 짧은 순간이 제일 무섭습니다.
제동 시험 규격을 보다가 더 놀랐습니다.
대만 자전거산업표준의 영문판을 확인했어요.
국제표준 ISO 4210에 대응하는 규격입니다.
로드바이크 제동 시험은 마른 노면에서 시속 25km로 합니다.
젖은 노면 시험은 시속 16km로 낮춰서 합니다.
같은 속도로 비교조차 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4. 타이어를 바꾸거나 바람을 빼야 할까요
사고 뒤에 저도 제일 먼저 장비를 검색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날 바꿀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어요.
수막현상 걱정은 접어도 됩니다
자동차식 수막현상은 자전거에서 사실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슈발베는 이론적으로 시속 200km를 넘어야 가능하다고 적습니다.
다만 이건 고인 물웅덩이까지 안전하다는 말은 아니에요.
웅덩이는 깊이도 바닥도 알 수 없으니 저는 그냥 피합니다.
미끄러짐은 수막이 아니라 그저 마찰이 줄어서 생깁니다.
트레드와 공기압은 제조사끼리도 말이 갈립니다
매끈한 젖은 포장에서 홈이 있는 타이어가 유리한지 찾아봤어요.
슈발베와 콘티넨탈은 슬릭이 접지 면적 때문에 더 낫다고 봅니다.
반면 비토리아는 트레드가 젖은 노면 그립에 도움이 된다고 적습니다.
제조사 공식 문서끼리 결론이 갈리는 대목입니다.
저는 그래서 비 온다고 타이어를 갈지는 않습니다.
공기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토리아는 젖은 노면에서 더 낮게 쓰라고 적어 두었어요.
슈발베는 압력을 낮추면 펑크 위험이 오른다는 대가를 적습니다.
얼마나 낮추라는 수치를 공개한 제조사는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조금만 빼고, 하한은 감이 아니라 타이어 옆면의 최소압을 봅니다.
낮은 압력의 대가는 펑크라는 점도 함께 생각하고요.
타이어 특성이 궁금하다면 휠과 타이어 종류를 정리한 글도 참고해 주세요.
다만 비 오는 날 당장 도움이 되는 건 장비 교체가 아니었습니다.
속도를 줄이고 코스를 고르는 쪽이 훨씬 빨랐어요.
5. 출발 전 3분, 제가 쓰는 판단표
이제는 창밖을 보고 기분으로 정하지 않습니다.
아래 표의 위쪽 조건이 하나라도 걸리면 그냥 접어요.
| 신호 | 무엇을 보나 | 제 판단 |
|---|---|---|
| 접는다 | 천둥·번개가 보이거나 들린다 | 기상청 국민행동요령의 30-30 규칙을 따릅니다. 번개 뒤 천둥까지 30초 이하면 즉시 대피하고, 마지막 천둥 뒤 30분은 더 기다립니다. |
| 접는다 | 호우주의보 이상이 발효됐다 | 호우주의보는 3시간 60mm 또는 12시간 110mm가 예상될 때 나옵니다. 자전거로 판단할 상황이 아닙니다. |
| 접는다 | 100m 앞이 흐릿하다 | 차에게 절반 감속을 요구하는 가시거리입니다. 그 속에서 저는 잘 보이지 않는 쪽입니다. |
| 조건을 붙인다 | 예보가 ‘약한 비’ 또는 ‘한때’다 | 기상청 예보용어에서 약한 비는 시간당 3mm 미만입니다. ‘한때’는 예보 구간의 절반 이하 동안만 내린다는 뜻이고요. 코스를 짧게 잡고 나갑니다. |
| 조건을 붙인다 | 기온이 낮고 오래 젖을 것 같다 | 젖은 채로 오래 있으면 체온이 먼저 무너집니다. 갈아입을 것을 챙기거나 코스를 줄입니다. |
| 조건을 붙인다 | 코스에 철판·그레이팅·낙엽 구간이 있다 | 커브와 겹치는 지점을 미리 떠올립니다. 겹치면 그 코스를 바꿉니다. |
| 평소처럼 탄다 | 비가 그친 뒤 노면만 젖어 있다 | 그래도 커브 진입 속도는 줄이고, 브레이크는 미리 잡습니다. |
표를 만들고 나서 좋았던 점이 있습니다.
나갈지 말지를 문 앞에서 고민하지 않게 됐어요.
출발 전 준비 순서는 장비를 고르던 글에도 정리해 두었습니다.
6. 비 오는 날은 ‘돌아오는 것’까지가 라이딩입니다
넘어진 날 제가 못 챙긴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대한 계획이었어요.
젖은 상태의 체온은 생각보다 빨리 떨어집니다.
질병관리청은 저체온증을 심부체온 35도 미만으로 정의합니다.
몸이 물에 젖거나 바람을 맞으면 열 손실이 크게 늘어난다고 설명해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는 기온 4.4도를 넘는 선선한 날씨에도 가능하다고 적습니다.
비나 땀에 젖어 몸이 식으면 생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제가 놓쳤던 사각지대가 있습니다.
기상청의 겨울철 체감온도는 기온과 풍속만으로 계산합니다.
젖음이나 습도는 아예 반영되지 않아요.
게다가 기온 10도 이하일 때만 산출됩니다.
비 오는 12도의 날에는 참고할 체감온도 값 자체가 없습니다.
숫자가 없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서운 건 추위 자체보다 판단력 쪽입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저체온증 경고 신호 목록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손을 제대로 못 쓰는 것’과 ‘혼란’이 들어가 있습니다.
손이 곱으면 변속과 제동이 늦어집니다.
하필 그게 가장 필요한 날에 그렇게 됩니다.
귀환과 보급 준비는 장거리 라이딩을 정리한 글의 기준을 그대로 씁니다.
비 오는 날은 거리가 짧아도 그 준비가 필요하더군요.
라이트는 예의가 아니라 의무였습니다
이것도 사고 뒤에 찾아보고 알았습니다.
도로교통법 제37조는 등화 의무를 밤에만 두지 않아요.
“안개가 끼거나 비 또는 눈이 올 때”가 따로 들어가 있습니다.
법제처는 이 조문을 자전거 등화 의무의 근거로 안내합니다.
비 오는 낮에도 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법제처 안내 기준으로 위반 시 범칙금은 1만원입니다.
다만 저는 금액 때문에 켜지는 않습니다.
1만원이 아까워서 켤 만한 물건이 아니니까요.
빗속에서 저를 늦게 발견하는 쪽이 훨씬 비쌉니다.
관련 규정은 자전거도로 법과 수신호를 정리한 글에 더 적어 두었습니다.
빗줄기 속 시야는 고글과 헬멧 이야기와도 이어집니다.
다음 비 오는 날, 제가 할 일
저는 비 오는 날을 끊지 못했습니다.
그날의 강변 공기를 여전히 좋아하거든요.
대신 넘어지고 나서 세 가지를 바꿨습니다.
첫째, 커브 안에서가 아니라 앞에서 속도를 줄입니다.
둘째, 철판과 낙엽이 커브와 겹치는 코스는 아예 안 갑니다.
셋째, 나갈지 말지를 문 앞이 아니라 표로 정합니다.
장비를 바꾸지 않아도 오늘 당장 되는 것들이에요.
정부 권고의 기본값은 여전히 ‘가급적 타지 않기’입니다.
그 위에서 굳이 나가겠다면, 속도만은 스스로 정하셨으면 합니다.
저는 그 숫자를 몸으로 배웠거든요.
이 글에서 확인한 자료
- 행정안전부 자전거행복나눔, 자전거 안전 이용수칙
- 행정안전부·국토교통부, 「자전거 이용시설 설치 및 관리 지침」(2022. 12) — 곡선부 설계, 배수시설·줄눈, 노면 청소 항목
- 국가법령정보센터, 도로교통법 제37조(차와 노면전차의 등화) · 도로교통법 시행규칙 제19조(악천후 시 감속)
- 법제처 찾기쉬운 생활법령정보, 자전거 운전자 — 교통법규 지키기
- 도로교통공단, 「빗길 교통사고 특성분석결과 발표」(2021. 7. 5.) — 2016~2020년 전체 교통사고 기준
- 이관호 외, 「블랙아이스로 인한 포장체의 미끄럼 저항 특성」, 한국방재학회논문집 24(2), 2024
- Mavic, Road brake pads: carbon and aluminium rims · SRAM Road AXS User Manual · Campagnolo Direct Mount Brakes User Manual
- TBIS 4210-2:2018 / 4210-4:2017 (대만 자전거산업표준, ISO 4210 대응 영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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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이미지는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제작한 그림입니다.



